
며칠 전, AI 관련 기사를 보다가 앤트로픽이 자사의 AI 모델인 클로드의 내부에서 인간의 의식을 닮은 생각의 공간을 발견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의 반발이나 저항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해당 발견이 AI가 인간처럼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유사한 목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은 확실하겠죠.
또한 앤트로픽은 이러한 구조가 인간의 의식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신경과학 이론인 "글로벌 워크스페이스(Global Workspace, GWT)" 이론과 매우 흡사한 특징을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읽다보니 오래 전에 보았던 애니메이션이 생각나더군요.
2000년인가.. 일본 TNK에서 제작, 방영한 "핸드메이드 메이"라는.. 벌써 26년이 지난.. 상당히 오래된 애니메이션입니다만..
내용은 단순한 러브코미디물이지만 그 애니에서 나오는 "사이버돌"의 메모리 체계와 메인 프로그램에 대한 설정과 많은 부분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앤트로픽에서 언급한 글로벌 워크스페이스라는 이론이 발표된 것이 1988년이고, 1990년대에 관련 분야에서 많은 관심을 받던 이론이었기 때문에 아마 애니메이션의 제작진이나 원작자들이 글로벌 워크스페이스(GWT)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2000년에 방영했다면 1990년대 후반에 제작했을테니.. 시기적으로도 딱 맞네요.

그럼 "글로벌 워크스페이스(Global Workspace, GWT)"이란 것은 과연 어떤 이론일까요?
GWT는 1988년 인지과학자 버나드 바스(Bernard Baars)가 그의 저서 "A Cognitive Theory of Consciousness"에서 처음으로 제안했습니다.
버나드는 초기 인공지능(AI) 시스템 아키텍처 중 하나인 블랙보드 시스템(Blackboard System)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블랙보드 시스템이란 독립적인 다수의 하위 프로그램들이 하나의 거대한 칠판(Blackboard)을 공유하며 정보를 교환하고 협업하는 방식을 가진 시스템이며, 버나드 바스는 이런 블랙보드 시스템에 인간의 인지 구조를 접목하여 GWT를 제안한 것입니다.
GWT는 인간의 뇌 작용을 "극장"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 무대 뒤의 관객 (무의식적 병렬 처리):
- 우리의 뇌에는 시각 처리, 언어 분석, 모터 제어 등을 담당하는 수많은 특화된 무의식적 모듈(Specialized Processors)이 독립적·병렬적으로 작동하고 있음
- 조명 스포트라이트 (주의):
- 수많은 무의식적 정보 중 주의(Attention)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특정 정보만이 무대 중앙으로 올라옴
- 글로벌 워크스페이스 (의식):
- 무대 중앙에 올라와 조명을 받는 순간, 그 정보는 '글로벌 워크스페이스(전역 작업 공간)'에 진입함
- 이곳에 진입한 정보는 대대적으로 방송(Global Broadcast)되어 무대 뒤의 모든 무의식적 모듈(관객)들에게 실시간으로 공유됨
- 이 공유 및 방송 상태가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것이 이론의 요체
앞에서 언급한 애니메이션의 사이버돌이 가진 메모리/프로그래밍의 숨겨진 공간, 앤트로픽이 주장하는 생각의 공간이 바로 이 글로벌 워크스페이스이고, 이 글로벌 워크스페이스의 상태가 우리의 의식이 머무는 곳이라는 거죠.
아직 인간의 지능이 무엇인지, 의식이 무엇이고 어떻게 발생하여 유지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GWT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론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 GWT는 심리학적 가설에 머물지 않고, 생물학적·신경과학적 근거를 확보하면서 프랑스의 세계적인 뇌과학자 스타니슬라스 드엔(Stanislas Dehaene) 등에 의해 "글로벌 뉴로널 워크스페이스 이론(Global Neuronal Workspace Theory, GNWT)으로 발전했습니다.
GNWT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fMRI 및 EEG를 통한 증명:
- 뇌 영상 촬영(fMRI) 및 뇌파(EEG)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자극을 받았으나 무의식에 머무를 때는 시각 피질 등 국소적인(Local) 뇌 영역만 활성화됨
- 반면, 그 자극을 '의식'하는 순간, 전두엽과 두정엽을 잇는 거대한 신경망(Frontoparietal Network) 전체가 폭발적으로 동기화(Ignition)되며 신호를 사방으로 전파하는 현상이 관찰되었음
- 의식 장애 연구:
- 식물인간 상태나 혼수 상태 등 의식 장애를 겪는 환자들의 경우, 이 전역적 작업 공간의 정보 통합 및 방송 메커니즘(Synergistic Workspace)이 손상되어 있음이 뇌과학 연구를 통해 증명되었음
또한 최근들어 이 이론들은 범용 인공지능(AGI) 및 에이전트 아키텍처 연구에서 다시 크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현재의 거대 언어 모델(LLM)이나 딥러닝은 강력하지만 각 기능이 파편화되거나 직렬적인 구조를 갖기 쉬운데, GWT 모델을 모방하여 "여러 자율적인 AI 에이전트나 모듈들이 하나의 공유된 컨텍스트 공간(Workspace)을 두고 경쟁 또는 협업하며 전역적인 판단을 내리는 구조"를 설계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인공지능 분야의 거두인 요슈아 벤지오(Yoshua Bengio) 교수도 의식 있는 AI 서브시스템을 설명할 때 이 GWT 아키텍처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고 하죠.
20여년 전, 애니메이션을 볼 때에는 대학을 막 졸업한 시기였기에 GWT에 대하여 모르는 시기였지만, 그 때에도 애니메이션의 내용 중 해당 설명을 들으며,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설명이라고 생각했고, 제작진들은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라고 궁금해 했었는데, 딱 그 시기가 GWT가 주목을 받던 시기였네요.
요즘은 뭔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머리 속에서 뒤섞여 혼란스러운 상태인데...
GWT도 한 구석에 넣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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